2012. 5. 27.

제목도 몰라



"응? 가자~ 가자~"

전공 수업이 끝나고 캠퍼스를 거닐다 갑자기 현아가 대뜸 요구를 해온다. 현승이는 됐다며 같은 남자애들 축구 하는걸 봐서 뭘 하냐는 식으로 대꾸를 했다. 거기에다 사실 현승은 평범한 남자애들과는 달리 모든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너 일 볼거 있음 보러 가. 나 먼저 갈께."
"오빠는 대체 언제까지 혼자 다닐 건데? 하도 과 사람들이 오빠가 나랑만 붙어 다니니까 사귀는지 알잖아!!!"

전역하고 다시 복학한 학교생활에서 현아는 유일한 나의 과 친구이자 캠퍼스 친구였다. 친구 사귀는데 편협한 현승은 그저 맘 편한 친구만 있으면 됐지 뭐, 많아서 뭐하나 하는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인맥이 넓다던가 나선다던가 하는 성격도 못되었다. 이런 상황에 현아는 유일무이하게 학교 내에서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속내를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현아는 현승과는 달리 발도 넓었고 이성을 대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애였다. 총여학생회 임원 자리도 하나 맡고 있었고 게다가 이번엔 그것도 모자랐던지 학교 축구부 매니저가 됐다면서 제발 현승에게 같이 가자며 꼬시는 중이었다.

"혹시 모르잖아. 맘에 드는 사람 있을 수도 있고. 한번만 나랑 가자~ 응? 내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오빠는 내 맘도 모르고 진짜 그러면 안 돼!!!"

한번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 현아의 성격을 알기에 결국 현승은 져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들 축구 하느라 오빠가 내 옆에서 똥을 싸도 신경 안 써"
"알았어. 가자 가."
"진짜? 진짜?! 오예!!! 오빠도 드디어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구나. 꺅!"

현승에게 연애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들에게 티를 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렇지 자신도 봄을 타고 있었다. 좋아하고 기대고 싶은 사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 쪽 세상에서 그런 부류의 사람을 찾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상 천지에 깔린 게이라 하면 연애는 무슨 '떡'으로 시작해서 '떡'으로 끝나는 게 게이니까. 이렇게 살다가도 인연이 된다면 누구라도 만나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늘 살아왔지만 그래도 현승은 외로운 게이였다.










daydreaming










날씨가 오락가락 하는 4월이었지만 마침 오늘은 날씨도 좋았고 현아 말대로는 축구부 연습도 잡혀있다며 오늘 바로 가자며 보채왔다. 대략 시간은 5시. 수업을 마치고 저 멀리 대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축구부 애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교내 편의점에서 게토레이와 포카리를 잔뜩 사들고서 현아는 현승을 짐꾼으로 부리며 빨리 좀 오라며 재촉을 해댔다. 현아의 마지못한 부탁에 가긴 가는 거지만 그래도 친한 오빠라며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도 기특했고 어쩌면 이제껏 찾아 헤맸던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조금의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무거워 죽겠는데 사방 천지에 깔린 흔한 축구 하는 남자 좀 보러가면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 자신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 한참 앞으로 달려가던 현아는 어느새 축구부원들의 무리에 섞여있었다. 마침 쉬는 시간인지 다들 땀을 식히며 숨을 고르고 있는 게 보였다. 현아와 같은 무리로 보이는 매니저(라고 불리는 애)들은 왜 이제 왔냐면서 현아를 채근해댔고 그런 현아는 미안하다며 인심 썼다는 듯 스포츠 음료를 사왔다고 생색냈다. 땀에 쩔어 있는 채로 찬기가 많이 가신 페트병만 물고 있던 축구부 애들은 현아의 희소식과 같은 소리에 좋아하면서 저 멀리 비닐봉다리 양손 가득 쥐고 있던 현승이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숫기가 없던 현승이 땀 흘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애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어쩔 줄을 몰라 순한 당황해했다. 현아는 그런 현승이를 알아채고 안 나눠주고 뭐 하냐며 봉지를 낚아채더니 큰 1.5L 음료를 인심 쓰듯 하나씩 나눠주었다. 다들 고맙다면서 꿀꺽꿀꺽 나도 달라며 꿀꺽꿀꺽 더위를 식혔다.

현승이 멀뚱멀뚱 현아 옆에 서서 자신이 사온 음료를 마시는 남자애들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양손 가득 들기 힘들 정도로 많이 사왔던 것 같은데 얼마나 마셔대던지 벌써 빈 페트병이 여럿 보이고 있었다. 이 때 그 무리 중 한명이 현아에게 다가왔다.

"현아야 고마워. 마침 물도 떨어졌었는데."
"아니에요 오빠. 오늘 이 오빠가 사준거에요."

현아가 이제껏 본 적 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뭔 쓸모없는 소리를 건네는지 옆에 있던 현아를 한껏 쳐다봤지만 현아는 혀를 내밀며 '이 오빠'라고 하면서 자신의 옷을 잡아당기는 통에 현아의 옆에 바짝 붙어 서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축구부 주장 윤두준이에요."

머쓱하게 잘 생긴 축구부 주장이라는 사람이 손을 내밀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들고 오느라 땀을 좀 흘린 현승이 손을 옷에 문지르며 악수에 응해줬다.

"안녕하세요. 현아랑 같은 과인 장현승이에요."

손을 가볍게 흔들더니 금방 풀어진 손에서는 아쉬운 기운을 내뿜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이런 인사를 주고 받는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항상 어색한 현승이 쭈뼛쭈뼛한 게 보였는지 옆에서 상황을 아는 현아가 뿌듯하게 웃어보였다. 뒤에서 선배! 선배! 라고 부르는 외침에 두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후반전 준비를 하러 돌아갔다. 멍하니 뒤돌아 달려가는 두준의 모습을 눈으로 쫒다 현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우리 벤치에서 경기 구경하고 가자? 알았지?"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오프사이드가 뭔지도 모르는 현승은 그저 현아의 옆에서 가만히 경기를 지켜보았다. 현아를 포함해서 아까 그 매니저(라고 불리는 애)들은 일어서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 매니저라기 보단 매니저의 탈을 쓴 축구부 팬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처럼 보였다. 애들의 응원 소리 외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제법 들리는 통에 운동장 주변을 둘러보니 지나가던 학생들도 제법 운동장 주위에서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제법 학교 축구부가 인기가 있구나 싶었다.

현승은 어렸을 때 몸이 약하거나 한건 아니었지만 운동에는 완전 젬병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끼리 제법 하는 축구도 몇 번 해보지 못했다. 운동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축구는 단지 그냥 공 하나를 쫒아 다니면서 뭔가를 한다는 게 영 어렸을 때부터 싫었던 터라 커가면서 축구와 멀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열심히 축구를 하는 애들을 보니 부럽기도 하면서 묘한 맘이 들었다.

멍하니 턱을 괴며 경기를 보는데 현승은 자신도 모르게 아까부터 시선이 그 '축구부 주장'에게 가있는걸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잘 하는 것도 같았다. '주장'이라는 애가 공도 계속 가지고 있었고 몸 사리는 것도 없이 태클을 마구 해댔다. 그 '주장'이라는 애가 공을 뺏게 되면 주변에서 들리는 함성도 조금씩 커졌다. 물론 옆에 있는 현아도 한 몫 더했다. 제법 잘 해 보이는 듯한 그 '주장'이라는 애는 골대 앞으로 한두 명씩 해치더니 쉽게 골을 넣어보였다. 주변에서 박수치는 소리가 들리고 현아가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와 진짜. 봤어? 봤어? 역시 두준 오빠…. 너무 멋있어…. 흑"

현아가 생뚱맞게 축구부 매니저가 됐다는 것부터 의아스러웠지만 역시 생각대로 축구부 애들과 허울 없이 지내기 위함인 것 같았다. 골을 넣은 주장의 곁으로 같은 팀원들이 하나 둘 다가오며 한마디씩 건넸고 엉덩이도 한 번씩 두들기며 격려를 해주었다. 현승이 그런 관경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두준이 순간 손가락으로 자신과 현아 쪽을 가리켰다. 현승이 아까부터 두준만 응시하고 있었으니 눈이 마주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치도 못한 일에 현승은 제법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지고 귀까지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꺅! 뭐야 오빠. 이거 벌써 둘이 통한거야? 악!!! 어떡해!!!"

현아가 얼굴이 빨개진 현승의 얼굴을 보면서 여자애 치고 제법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두준 오빠 여자 친구도 없어!!! 아 진짜 오빠...ㅋㅋㅋ 어떡해! 어떡해!"

현아가 2차로 자진모리장단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뭣도 모르면서 옆에서 호들갑 떠는 현아를 보니 한숨을 푹 나왔다. 자신을 향한 골세레모니를 보고선 순간 가슴이 철컹 했던 건 맞지만 설마 '그런 일'이겠어 하는 마음으로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보았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집에 오자마자 발가락으로 컴퓨터도 켜지 않고 핸드폰을 쥐며 뒹굴 거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이 축구부 주장으로 가득차있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축구도 잘하고 운동을 잘하니 몸도 좋을 거고 생각해보니 너무 완벽한 남자애였다. 그런 애가 아까 골을 넣고 왜 자신을 가리켰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현아를 좋아하나? 딱히 그래보이진 않던데. 그러면... 내가 맘에 든 걸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리니 순간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현아 말대로는 여자 친구도 없다고 했는데 뭐 얼마 전에 헤어졌을 수도 있는 거고. 그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두준이 설마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었지만 괜한 기대감만 부풀리지 않아야겠단 생각에 이만 생각을 접기로 했다.










특별할 것 없는 대학 생활을 하고 보니 어느덧 과대가 이번 주 금토일이 MT라며 공지를 했다. 옆에서 현아가 가자고 권했지만 MT란 단어를 떠올리니 앞으로 펼쳐질 광경들이 눈에 훤히 보였다. 우선 여자에 환장한 -복학생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성애자 남자애들은 신입생 후배 한명 꼬시려고 술은 술대로 먹이며 썸씽을 만들게 뻔했다. 또 누군가는 선배의식에 절어서 후배들 군기 잡으려고 애쓸 테고 또 누구는 의미도 없는 술 게임을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하면서 놀거라는걸 알았다. 그러다 괜히 자고 있는 애들이 있으면 잠도 못 자게 깨우고 술을 또 먹이고. 피곤한 일이었다. 이런 짓을 이틀 밤을 하고 다시 돌아온다는 게 굉장한 체력소모로 느껴진 현승은 현아에게 안 간다고 딱 부러지게 얘기를 했고 현아는 한번 건네 본 말이었는지 더 이상 현승을 보챈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전공 교수님들께 동의를 받고 금요일 아침부터 출발하는 게 보통 일정일 테니 현승은 오랜만에 기광이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짰다.










잠을 아무리 더 자보려고 해봐도 더 이상 안 오는 걸 보니 몸만 더 피곤해질까 현승은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켰다. 이불 속에 엉켜있는 핸드폰을 켜보니 벌써 오후 2시다. 숫자가 떠있는 카톡에는 현아가 신나게 놀고 와서 부럽게 만들어줄 거라는 대화가 띄워져있었다. 핸드폰을 침대에 다시 던져두고 조금씩 출출해지는 게 느껴진 현승은 터벅터벅 다가간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역시나 먹을 것 하나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현승은 물로 허기를 채웠다. 그러다 머릿속에 두준이 떠올랐다. 혹시나 운동장에 있을까?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동해 운동장으로 가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광이를 만나기까진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체대 애들로 보이는 애들이 끼리끼리 모여 열심히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축구부 애들인지 무슨 과 애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허탕 쳤나 싶은 마음에 그냥 햇볕이나 쬐면서 시간이나 때워야지 싶은 마음에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운동장을 자기 방처럼 후비고 다니는 체대 애들을 보면서 하루가 멀다고 저렇게 뛰기만 하는걸 보니 참 힘들기도 하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두준이도 매일 저렇게 체력 운동을 하겠구나 싶었다. 한참 동안 생각 없이 운동장만 바라보며 음악을 들으며 입 모양으로 뻥긋하고 있었는데 순간 이어폰이 빠져나갔다. 이어폰을 다시 꽂으려고 옆을 바라보는 순간과 동시에 옆에 누군가가 내 옆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 본 시선의 끝엔, 두준 이었다.

"무슨 노래 듣고 있어요?"

두준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끼고 있던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두준이를 보려고 나온 운동장이긴 했지만 허탕 친 마음에 녹록했는데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두준을 보니 기쁘기도 했지만 놀란 마음이 더 컸다.

"여기서 뭐해요?"
"그냥 수업도 없고 바람도 쐴 겸해서…."
"저 보러 온건 아니고요?"
"네? 아…. 그게"
"농담이에요. 농담."

두준이 그냥 떠본 말에 현승이 넘어갈 뻔 했다. 장난으로 해본 말일 텐데 자신은 그게 진심이어서 말만 더듬어버렸다. 얼마나 멍청해보였을까. 속으로 수없이 울었다.

"그런데 오늘 MT 아니에요? 현아가 금요일 엠티 간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아닌가."
"그냥 안 가게 됐어요. 어차피 가봤자 술만 마실 텐데…."
"아. 그렇구나."

두준이 대답을 하면서 싱글벙글 웃는다. 두준은 자신이 어떤 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를 텐데.

"현아 말로는 그 쪽도 08학번이라고 들었는데. 저도 08이에요. 우리 나이도 같은데 말 놓아요. 아 이거 불편해 죽겠다."

언제나 어색하기만한 이런 상황은 현승을 늘 힘들게 만들었다.

"어…. 그래."

라고 대답하고 보니 할 얘기가 없었다. 순간 약한 바람이 일어 좋은 냄새가 코를 스쳤다. 따스하게 쬐는 햇볕에 현승은 눈이 약간 풀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넌 어디 가는 길?"
"나 수업 들으러. 저기서 수업 들어."

두준이 가리킨 곳을 보니 운동장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물이었다. 체대건물이니 전공 수업이겠구나 싶었다.

"우리 언제 현아랑 셋이서 술 마실래? 아 술 안 좋아한다고 했지. 그럼 밥이나 먹자."
"네. 아 응응"
"그럼 먼저 갈게."

두준이 끼고 있던 이어폰을 다시 자신의 귀로 꼽아주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뒤로하던 두준은 운동장 옆 체대 쪽으로 점점 멀어졌다. 두준이 어느 정도 자신과 멀어져있는걸 보고서 현승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푸우우 내쉬었다. 갑작스레 긴장했는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던 터라 숨이 제법 가팔랐다. 그러고 보니 두준이 곁에 있을 때 나던 냄새가 다시 떠올랐다. 무슨 향수를 쓰는 걸까. 점점 두준이를 향한 마음이 커지는 게 가슴이 너무 답답해져왔다. 이번에도 결국 짝사랑만 하다가 끝날걸. 현승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도 두준을 만났단 생각에 현승은 무척이나 기뻤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이 감정에 마음도 많이 부풀었다.

■[아직도 안 갔네?]

모르는 사람에게서 카톡이 왔다. 대화창을 열고 바라본 사진과 대화명은 자신이 등록한 친구가 아니었다. 현승은 화면에서 눈을 떼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핸드폰에서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나 두준이ㅋㅋㅋ]

그러고 보니 이 대화명은 몇 일전부터 친구추천 탭에 떠있던 모르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그 대화명'이었다. 두준이 언제부터 내 번호를 알고 있었던 거지?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제 가려고. 근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안거야?]
■[현아한테 물어봤어. 왜?]

궁금한 건 난데 오히려 나에게 반문하며 물어보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순간 머릿속에 빨리 회전하기 시작했다. 분명 현아 말로는 여자 친구가 없다고 했었고 두준은 인기도 많고 잘생겼고 축구부 주장까지 하는 애이면 축구를 보통 잘하는 것도 아닐 테고 머릿속에서는 이미 "yo Y두준, 즈~엉말 잘생겼고! 그리고 축구도 잘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 그게 바로 perfect☆ 그게 바로 인생의 진리지~♪" 아 이게 아닌데. 아무튼 두준이가 현아를 통해서 자신의 번호를 땄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도 아니고 한번 봤던 남자애 번호를 왜 따지? 왜?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생각나지 않은 현승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두준이 보낸 문자를 이미 읽었으니 답은 해줘야 할 텐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아 수업 지루하다.]
■[말 나온 김에 저녁에 같이 밥 먹을래? 나 수업 빨리 끝날 것 같은데]

혹시 두준이도…? 그러기엔 너무 단정지을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리고 설마 두준이가 자신과 같은 게이라고 해도 자신이 좋아해왔던 남자들은 모두 이성애자였기에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100% 짝사랑의 이력에 혼자 속 앓이 하면서 절절한 사랑을 해왔던게 여기서 끝이 날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신을 두렵게 만들어주었다. 그래봤자 윤두준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닌 진 알 수 없었지만.

□[미안 오늘은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는 kinetic이었다. kinetic은 기광이 운영하고 있는 (게이)라운지 바였다. 기광은 어렸을 적부터 둘도 없는 보육원 친구였다. 자신과 동갑내기였지만 기광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공부는 영 별로 던지 서울 생활 하는데 돈만 축낼거란 걸 알고는 애초부터 대학 진학을 포기했었다. 그러고 나서 성인이 되면서부터 이태원 등지에 있는 게이바란 게이바는 다 꿰뚫고 다녔다. 그 때문일까 보통을 넘는 끼와 외모를 갖고 있는 기광은 제법 번듯한 애인을 사귀었고 그 덕에 이렇게 이태원 진출 3년 만에 라운지바 하나를 갖게 된 경영 사업가가 되었다. 이제 겨우 2년차의 새로 생긴 바였지만 마스터인 기광이 그동안 이태원에서 얼마나 이름을 날렸던지 꽤나 괜찮은 라운지바로 이름을 떨치지 시작했다. 우리의 나이가 나이다 보니 여기 kinetic을 방문하는 게이들도 20대 후반을 크게 넘어가지 않았다.

금요일 밤이라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이 북적 거렸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스텝은 현승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기광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기광이가 처음으로 kinetic을 오픈하고는 기광이네 집에 온다는 생각으로 매주 왔었는데 최근 들어 자주 오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녘에 닫는 장사라 기광이를 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여기에 오는 거란걸 서로 알고 있었고 그 덕분에 기광이 그동안 많이 서운했을 걸 현승은 알고 있었다. 스텝이 안내해주는 바테이블로 가니 그곳에 기광이가 앉아있었다.

"야 난 너 죽은 지 알았다."
"미안 미안 기광아"

기광은 현승을 가볍게 포옹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바텐더 자리로 들어갔다. 현승의 음료 취향을 아는 기광은 모히또 두 잔을 직접 만들고서는 현승의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가 제법 컸지만 모처럼 오니 기분도 좋고 가장 중요한 머릿속을 거둬주는 것 같아서 현승은 기분이 좋았다.

가볍게 두잔 정도 마셨지만 현승의 취향에 맞게 럼의 양을 조절했기 때문에 기분 좋게 취한 상태였다. 취하면 잘 웃고 목소리 톤도 높아지는걸 아는 사람이 바로 기광이기 때문에.

"장현승씨는 요새 또 누굴 마음속에 품고 사시나"
"됐어."

현승의 연애 스타일을 아는 기광이 현승이의 근황을 알 겸 한번 던져보았다.

"여기 올 때마다 좋다고 오는 남자들 다 거절하고 그러면 너, 절대 사람 못 사귄다. 너?"

귀에 딱지가 앉도록 기광이 매번 하는 말이었다. 기분이 마침 좋았는데 왜 그런 소리를 매번 해대는지 현승은 그런 기광이 맘에 들지 않았다.

"너는 너무 몸을 사려. 자고로 게이는 몸을 먼저 줘야 마음도 주는 거고. 너처럼 마음을 먼저 주고 몸 주는…."
"아 됐어 그만 쫌!"

기광이의 게이학개론이 또 시작됐다. 아주 올 때마다 지겹다. 자신도 모르게 그동안 kinetic에 발걸음이 뜸한 건 이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기광이가 저런 말을 한다고 해서 몸 하나 관수 못하고 여기 저기 내주는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선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라는 기광이의 충고라는 걸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런대도 마음이 안 따라주는데 어떻게 해.

"아니면 내가 괜찮은 사람 한명 소개 시켜 줄까?"
"그래봤자 여기 손님이잖아"
"야! 너는 너무 모 아니면 도야. 내가 나중에 꼭 소개시켜줄게"
"됐어."

잔을 들었지만 어느덧 얼음 밖에 남지 않은 걸 보고 현승은 약간의 더위도 식힐 겸 얼음을 하나 물었다. 그런 현승을 보고서는 기광이 다시 안쪽 바텐더 석으로 들어갔다. 현승은 저 멀리 플로어석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남자들을 흘겨보았다. 춤도 다들 잘 추네. 현승은 여기에 와서 단 한 번도 플로어석에 가본 적이 없었다. 춤도 춤이거니와 워낙 낯을 많이 가리기 때문에 당연한건지도 모른다. 조명 때문인가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사람들의 머리 빛이 환하게 비쳐보였다. 정말 예쁘다, 하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중에 익숙한 얼굴이 시선에 꽂혔다. 절대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머리에 손을 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그럼 두준이가 게이인 게 맞는 거야?

"야, 왜 그래? 벌써 머리 아파?"

머리를 지긋이 눌러 보이는 현승을 보고 두통을 호소해보였는지 기광은 걱정이 돼서 말을 건네 보았다.

"기광아, 기광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여, 여기에 학교 사람이 있어."

현승의 말을 듣자 기광은 뭐 별 것도 아니네 라는 식으로 웃어보였다.

"야, 게이가 대한민국에 몇 명인데 몇 천 명이 다니는 너희 학교에 게이가 딱 너만 있겠냐?"

기광의 말을 듣고 현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누구? 누구?!"

그제야 기광이 반응을 보였다. 현승은 저, 저기 손가락으로 플로어석을 가리키며 두준의 옷차림과 생김새를 읊어보였다. 기광이 현승이 가리킨 손끝에 부합하는 사람을 보는데,

"아 두준이? 두준이가 너네 학교였어?"

이건 또 무슨 반응이야. 현승이 기겁을 했다.

"어떻게 이름을 알아? 두준이를 알아?
"두준이 우리 집 단골인데? 나랑도 친해. 우리랑 동갑일걸?"

두준이도 게이란 말이지. 두준이가 게이. 축구부 주장이 게이.. 축구부 주장... 윤두준...
다음부터 두준을 보면 어떻게 대할지 앞이 깜깜해져왔다. 그 때 기광이 크게 손을 흔들여보였다. 기광이 향한 시선의 끝에 있는 두준이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플로어석에서 나와 두준은 점점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망했다….

"기광아. 나 어떡해? 아 난 몰라. 아. 아"
"뭐 어때. 어차피 아는 사이라며. 이렇게 알게 되면 더 좋은 거 아니야?"
"야 이기광 네가 뭘 알아. 네가... 아 아 어, 어떡하지."

그 와중에 두준은 어느 덧 가까이 와서 기광의 맞은편에 앉았다. 현승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기광이 자리를 비워두고 앉은 두준은 기광의 양 옆으로 현승과 두준이 있는 꼴이 돼버렸다.

"기광아 예거밤 한잔."

현승은 고개를 푹 숙이고 기광이와 두준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을 조금씩 고르며 기광이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를 들으니 진짜 윤두준이 맞았다. 두준은 주문된 예거밤 한잔을 받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두준을 보고 기광이 잘 마신다며 서비스로 한잔을 더 내주었다.

"근데 기광이 네가 왜 안쪽에 있어?"
"마침 친구가 와서 내가 만들어주느라. 여기 내 친구야"

기광이 팔을 뻗어 현승에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친구? 뭐야 설마 애인?"

애인이라니, 애인이라니…. 현승의 가슴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비트를 넘어 더 가빠른 속도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

기광이 계속 어깨동무를 해왔다. 기광은 이렇게까지 했는데 인사 정도는 해야 되지 않나 싶었지만 현승이 영 고개를 돌리지 않자,

"미안, 얘가 워낙 쑥스러움이 많아서."

두준이 기광을 보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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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27  -
두준과 기광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5분 내로 끝날 듯하지 않음. 어떻게 해야하지 뛰쳐 나가야하나 계속 고개만 돌리고 모히또만 홀짝홀짝 하기도 민망함. 그러다 두준이 눈치 챘는지 친구분이 제가 같이 있는게 불편하신 모양인데 두분이서 얘기나누라고 자기는 가겠다고 하면서 감. 동행이 있던건지 플로어에 있던 사람과 얘기를 하더니 테이블로 감. 현승이는 그걸 다 흘낏흘낏 봄. 저런 모습을 보는 순간 저 남자가 두준이의 친구인지 혹은 애인인지 계산하고 있었음. 기광이 왜 그러냐고 무슨 일 있냐고 왜 이렇게 낯을 가리냐며 물어오자 나중에 얘기해주겠다고 오늘은 먼저 가겠다고 말을 함. 기광이 애가 뭐가 있구나 싶어 알았다고 나중에 다 얘기해달라면서 멀리 안나가겠다며 현승이를 편히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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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좀만 가면 친구 알바 하는데 있는데 거기 가자! 친구가 술도 서비스로 줄꺼야. 가자~ 가자? 응?"

계산하고 나오자 마자 길가에서 현아가 우릴 보며 2차를 가자고 안달을 부렸다. 오랜만에 많이 마신 술이라 그런지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냥 정신이 없었다. 눈을 살짝 감았더니 머리에서 어지러움이 동반하는걸 느끼고는 더이상 마시면 안되겠구나 싶었다. 그런 현승을 알아차린건지 두준이 오늘은 처음인데 그만하고 다음에 실컷 마시자며 현아를 채근했다. 기분이 좋아 더 마시고 싶었던지 아쉬운 소리를 하던 현아는 알았다면서 금방 수긍을 했다.

우리와는 달리 서울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현아를 위해 지하철 입구까지 배웅을 해주고는 서로 말도 없이 자연스럽게 자취촌을 향해서 걸음을 향했다. 말없이 나란히 거닐려니 굉장히 어색한게 느껴졌다. 이런 어색함을 이길 힘이 없는 현승은 그냥 머리만 짚어대며 따라 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색한게 많이 허물어졌다고 느낀 것 같았는데 이게 다 현아의 노력이라는걸 깨달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꺼내야겠다 싶어 뭔 얘기를 꺼낼까 싶었던 찰나 두준이 근처 편의점을 보며 잠깐 들렸다 가자고 해줬다. 좀 다행이다 싶어 알았다고 했다.

익숙하게 카운터에서 담배를 사는 두준이 간단하게 술이나 한잔 더 하자면서 음료 코너에서 맥주 4캔을 꺼내왔다. 머리가 아직까지 아파왔지만 괜찮겠다 싶었다. 편의점을 나오자 조용한 거리에 비닐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크게 들려온다다.

"넌 어디 살어?"
"나 @@빌. 너는?"
"난 좀 더 가야돼. 그럼 가까운데 너네 집에서 마실까?"
"그래."

누군가 내 집에 온다는거, 특히 두준이가 자신의 집에 온다는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금방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마실거 두준이네에서 마시느니 차라리 자신의 집에서 마시고 두준이를 내보내는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사는 이 곳은 그렇게 좋은 시설의 원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대학 보조금은 조금씩 기광이가 보태줬기 때문에 현승 역시 부담없이 살 수 있는거였다. 전역하고 나서 누군가를 집에 들이는게 처음이기 때문에 되게 낯설었다. 남자사는 집 치고는 깔끔한 현승의 집을 보며 두준은 혀를 내둘렀다.

"너 되게 깔끔하구나"

두준이 감탄하는 소리에 현승은 딱히 할 말 없이 머쓱거렸다. 두준이 사들고 온 비닐봉다리를 방 한가운데 두고는 침대 끝에 걸터 앉아 몸을 뉘었다. 그런 두준을 보고는 현승은 주방으로 가 그 동안 먹지 않고 내버려둔 과자 두봉지를 가지고 두준의 곁으로 갔다.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입학 동기 남자애들과 돌아가면서 방에서 술 마시는게 학기내 다반사였는데 전역 하고 나서는 누군가를 집에 데려오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손님 대접하기가 마냥 어색한 현승이었다. 현승은 누워있는 두준을 위해 맥주캔 하나를 따서 두준에게 건내주자 두준이 고맙다며 캔을 받아 들었다. 현승은 과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혹시 두준이 요깃거리를 찾을까봐 봉지 두개를 먹기 편하게 터놓고서는 자신도 맥주를 홀짝홀짝거렸다.

정말 잘 생겼구나. 현승은 생각했다.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남자다움을 두준은 가지고 있었다. 두준이 너무 멋있어서 넋을 놓고 바라보니 눈을 감고 누워있던 두준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정신이 확 들었다. 자신도 모른 사이 두준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민망했던지 현승은 술을 또 벌컥벌컥 마셨다. 두준이 웃으며 그런 현승을 바라 보았다.

"분명히 그 때 술 안좋아한다고 했던거 같은데. 잘 마시는거 보니까 좋다. 자주 이렇게 마시자."
"응"

술을 안좋아한다는건 친하지 않은 그러니까 내 속내를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마신다는 거에 한정된 의미었다. 현승은 자신이 두준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태산이었지만 아무것고 꺼내지 못한채 속으로만 가두고 있었다. 그 첫번째로 현아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었다. 이성애자 남자들이 보통 여자를 건너서 남자 전화를 물어보는 경우는 어떤 경우에도 생각나는게 없었다. 시험 범위 물어보려고...?(는 아닌 것 같고.) 둘. 그 날 kinetic에서 만났던 기광이의 친구는 나였다고. 이걸 말하면 커밍아웃을 하는 꼴이 돼버리니 이것 또한 말을 할 수 없었다. 세번째로는 같은 날 함께 있던 남자는 남자친구였는지. 이건 두번째를 건너뛰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라 생략하고 결국 남게 되는건 첫번째였다.

"근데..."
"응?"

두준이 현승을 바라봤다. 현승은 생각한 김에 주저 없이

"왜 현아한테 내 번호 물어봤었어?"

결국 물어봤다.
그런데 두준이 바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역시 자신의 질문이 이상했던걸까. 자신이 너무 산으로 간걸까.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물어본 것일수도 있는데 지금 자신의 뇌가 과부화에 걸려 얻어낸 결과는 단순 오류였을까. 괜히 민망해진 현승은 농담..농담이었다며 그냥 나한테 물어보지 하며 가볍게 웃고 맥주를 한모금 삼켰다.

"처음에..."

두준의 눈이 반쯤 풀린 상태로

"첫 눈에 보고 맘에 들어서"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당황한 나머지 반쯤 삼킨 맥주를 뱉지도 못하고 크게 삼켜버리니 사레가 들러버렸다. 두준이 마저 당황해 괜찮냐면서 등을 가볍에 툭툭 쳐줬다. 괜히 미안하다며 말을 건냈다.

"사실 확신이 안들었어."

미간을 구기며 두준을 바라봤다.

"현아가 널 소개해주기 그 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뭐?"

현승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반톤이 올라간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안건데.

"친구랑 처음 kinetic을 갔을 때 널 처음 봤었어. 그 후로 널 보려고 매번 갔었는데 너가 자주 오지 않는다는걸 알았어. 친구 말로는 한번도 남자들을 받아주는걸 본 적이 없고 거절하는걸로 유명하다고. 그랬어, 그러다가 현아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를 봤는데 그게 너였지. 너가 우리 학교일줄이야... 생각도 못했던건데."

두준이를 바라보는 현승의 눈빛이 독촉으로 변하고 있었다.

"좀 쉬워질 수 있겠다 싶어서 현아한테 전화번호를 물어봤지. 현아가 좋아하면서 번호를 알려주더라고.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네 번호를 알아냈지. 그리고 운동장에서 만난 날. 전공 시간에 창가를 바라 보는데 너가 보였어. 난 또 혹시나 하는 맘이 일어서 너한테 갔지. 우연히 그 때 수업 가는 척 지나갔던게 아니었다고. 그리고 그 날 밤에 kinetic에서 또 널 만났지. 기광이가 친구라길래 그런가보다 했는데 보니까 너였어. 널 좋아하는데 뒤통수만 봐도 알겠더라, 옷이 같았던건 두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그 때 확신했지. 너가 게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걸. 그냥 기광이 친구여서 그동안 kinetic에 왔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 솔직히 kinetic에 오는 손님 중 한명이라도 게이가 아닐 수도 있는 일이고. 그리고 어차피 넌 그날 날 봤으니까 내가 게이인걸 알아챘겠지. 그렇다면 나는 더욱 더 상관 없으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현승은 두준의 얘기를 듣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기광이를 만나러 간 날 왜 나를 못 알아봤을거라고 생각했을까. 생각해보니 옷이 같았다는건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현아 덕에 두준이를 처음 만나기 전부터 두준이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게 그리고 내가 kinetic에서 그런 이미지였다는게 더 놀라웠다. 간단히 술 마시러 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보다 다른 이유로 접근해오는 사람들이 많은건 사실이기 때문에 늘 거절해왔던건데 그걸 그런식으로 받아드렸다니. 게다가 내가 모두 거절하고 기광이의 오랜 친구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게이가 아니라고 단정짓고 추측하는 것마저 나와 너무 같아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캔에 마저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현승은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대답이 없는 현승을 보니 두준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을 마저 꺼냈다.

"혹시 현아 좋아해?"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릴까. 두준이가 오해를 해도 한참 하고 있구나. 나는 거두절미하고 절대 아니라고 했다. 그제서야 두준이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해줬다.

"괜히 이런 얘기 꺼내는 바람에 분위기만 깨져버렸네. 슬슬 가봐야겠다."

마침 일어서려는 두준이 잠깐 멈칫 하더니

"그래도 이제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이건 거절하지 말아줘"

두준이 침대에 기대 앉아있던 현승에게 다가갔다. 그리고선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놀란 나머지 두준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니 가볍게 떨어지는 두준이었다. 피식 웃어보이던 두준이의 눈이 슬퍼보였다. 뭔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구나.

"그럼 이만 가볼께. 다음에 보자"

두준이 갈 채비를 하며 일어나려는 순간 현승이 두준의 손을 잡아챘다.

"아니야. 너가 알고 있는거 다 아니야. 나는... 나... 나는..."
"..."
"나... 게이야"

두준이의 놀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나도. 너... 좋아해."

말을 마친 현승은 자신도 모르게 두준의 입술로 다가가 입을 맞췄다.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걸 가질 수도 있을 기대감 때문인지 혹은 이제까지 겪지 못할 것들이 펼쳐질 두려움 때문인지. 또 다른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렀다. 현승은 가볍게 누르고 있던 입을 떼고는 조그맣게 실눈을 떴다. 두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서로에게 피해가 간 것은 아니었지만 오해의 골이 컸다. 미안할 것도 없는데 괜한 미안함에 두준을 보질 못하고 눈을 굴리기에 바뻤다. 두준의 손이 현승의 앞머리를 쓸어넘기더니 뒷통수에 자리 잡았다.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지긋이 눌러진 머리는 서로 다가와 코만 맞닿은 상태가 되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의 두준은 약간은 화도 나있는 듯 보였다.

"진짜 나 좋아해?"

대답 대신 고개를 무겁게 끄덕거렸다. 두준이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 어려운거겠지.

"고마워."

순간 두준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는게 보였지만 입이 맞춰지는 바람에 현승은 눈이 감겨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이제는 부드러운 입술을 넘어 말캉한 혀가 맞닿았다. 생소한 느낌. 언제 해본지도 모르는 키스. 모든게 무뎌서 잠겨있는 동굴 같은 감각에 하나하나 횃불이 켜지는 느낌이다. 달콤한 맛에 빠져 서로의 혀를 떼지 못하며 서로의 입 안에서 우리는 뒹굴었다. 두준이 다가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현승은 침대를 옆에 두며 몸을 가누었다. 눈에서 흐르는 수 많은 눈물이 서로의 얼굴에서 뜨겁게 뭉개졌다. 진심으로 좋아했구나. 진심으로 좋아해줬구나.

혼이 빠진 듯 정신없이 입술과 혀만 옳아맸더니 점점 호흡이 가빠져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슬슬 술이 깨는 것도 느껴졌다. 자연스레 멀어지는 현승을 알아챈 두준도 알아서 스스로 입술을 떼내었다.

"흠흠..."

목이 마른지 마셔두었던 맥주캔을 드니 손에 닿는 느낌이 제법 많이 식어있다. 그래도 목이 말라 꿀꺽꿀꺽 마셨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현승아"

조금은 잠겨있는 목소리로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피하고 있던 현승이 두준을 바라본다. 두준이 손을 꺼내오더니 현승의 손 위에 살짝 겹쳐왔다. 두준이 몸에 닿았다는 생각에 현승은 몸이 움찔거렸지만 상관 없다는 듯 현승이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우리 천천히 시작하자."

2012. 5. 1.

냄새


난 '이' 냄새에 약했다.
개인 스케줄이 없는 이상 1년 365일. 거의 24시간동안 하루 종일 붙어있는 우리 멤버들. 그 속에서도 '두준'이는 나에게 특별하게 존재했다. 그 이유는 항상 두준이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체향(體香)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냄새로써 두준이가 특별하게 다가온건 두준이를 처음 만나고 얼마 안가 바로 알아차린 후였다. 우린 첫 만남부터 같은 그룹에 소속될 운명였고 숙소에서는 한 방을 쓰면서 하루에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습하는데 투자해야했으니까.


'그' 좋은 냄새는 항상 나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데뷔 날짜를 코앞에 두고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기에 더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촉박하게 정해진 일자에 우린 꾸미기는 커녕 온전히 숙소-연습실-숙소만 찍고 다녔다. 밥을 먹을 때도 춤을 출 때도 노래를 하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잘 때도. 대체 뭘 바르고 뿌렸기에 하루종일 좋은 냄새를 달고 사는걸까 싶었다. 하지만 그 때의 두준이와 나, 우리 사이에는 같이 데뷔할 그룹의 멤버이자 동갑내기 친구. 그 이상 특출 날게 없는 사이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가 이런걸 물어보기엔 좀 어색한 사이가 아닐까하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이것을 직접 물어볼 필요까지는 없었다. 숙소에 가서 두준이 무슨 화장품을 쓰는지 혹은 무슨 향수를 쓰는지 잠깐만 곁에서 살펴보면 될 일이었다.


여섯 명 각자가 쓰는 여러 브랜드의 화장품이 뒤섞여있는 화장대. 그 가운데 두준이 바르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두준이 바라보는 거울 속, 구석 쪽에 내가 존재하게끔 눈에 띄지 않게 바라보았다. 두준의 얼굴과 화장대에 홀로 떨어져있는 화장품을 번갈아보는 와중에 거울 속 두준과 눈을 마주쳤지만 자기 할 일에 정신없던 두준이는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충 발랐다고 생각드는지 두준은 얼굴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선 방을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난 미리 스캔해놓은 두준의 것의 좌표를 따라 하나씩 화장품을 손에 쥐었다. 골라놓은 세 개의 화장품을 아까 두준이 얼굴에 발랐던 순서대로 나란히 놓았다. 정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차례로 화장품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주입구에 코를 한참을 대고 개처럼 킁킁 거려봤지만 딱히 두준이의 그 '특별함'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혹시 살에다 바르면 좀 다를까? 가볍게 손바닥에 덜은 후 손등에도 바르고 팔뚝에도 바르고 두준이처럼 얼굴에도 발라보았지만 벌거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샤워젤? 바디로션? 아니면 샴푸 냄새인가? 화장품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은 후 화장실 구석구석을 뒤져봤지만 내가 아는 데로 화장실 욕조 구석에 자리한 것은 멤버들이 공용으로 쓰는 제품들, 딱 한가지씩 뿐이었다.










아아, 현기증이 난다. 불이 꺼진 방 안에는 온통 두준이의 냄새로만 가득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지만 두준이가 먼저 '현승아 자?' 하는 물음에 말꼬가 터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두준과 나란히 누워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별로 재미없는 얘기도 재미있게 들렸다. 이미 모든 정신은 두준이에게 향해있다. 두준이가 가지고 있는 냄새로. 두준이와 같은 방을 쓰게 되면서 항상 이런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며 좋은 냄새와 함께 잠에 들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냄새에 민감했을까. 태어나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다. 남들 다 쓰는 향수도 잘 안쓰는게 나였다. 대만 프로모션 이후에 대표님께서 선물해주신(거지만 사실 여기저기 지방시 play의 광고가 많이 보여서 고른게 맞는) 향수는 마음에는 들었지만 원체 향수에는 관심이 없다보니 play 이 후로 별다른 향수를 쓰진 않았다. 선물을 받아도 가끔씩 써보는 그 뿐 이었다. 난데없는 이상한 집착이었다.


정말 다행인건 우린 서로의 스킨쉽에 많이 익숙한 상태였다. 적어도 내가 아니라도 두준이는 그렇다고 확신했다. 서로의 스킨쉽에 익숙하다는건 내가 노력을 한다는 전제하에 이뤄질 수 있는 명제였다. 난 스킨쉽을 두준이와 내가 가지는 관계의 척도로 판가름했다. 데뷔 초 서먹했던 사이가 지금은 많이 누그러지고 모든게 자연스러웠다고 느껴졌다는게 모두 스킨쉽으로 느끼는거였다. 두준이가 내게 스킨쉽을 하면 난 냄새에 못이겨 긴장이 풀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얼굴이 무너져내릴까 혹은 무심결에 봐버렸을까 혼자 속으로 전전긍긍했다. 날 이상하게 보는게 싫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느껴졌다. 두준이 잠 들었을 때 내는 특유의 숨 고르기를 듣고 알아차렸다. 가만히 몸을 두준이 쪽으로 바짝 붙였다. 워낙 잠버릇이 심한 나니까 === 고개를 숙이고 두준이의 목 곁으로 좀 더 다가가 들키지 않는 하에 깊게 숨을 쉬었다. 누구에게도 맡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두준이만의 체향이 내 폐부 로 들어온다. 나른함을 동반하는 이 기분은 몸 속 깊숙이 반응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풀어져버렸다.


숙소 있을 때는 그렇게 잠이 안오던게 해외 공연 나갈 때 두준이 너랑 같은 방만 쓰면 항상 잠이 잘 왔어.
그랬었어?


두준이와 룸메가 되고서 첫날밤. 나의 고백과도 같은 말을 두준은 칭찬으로 받아드렸는지 웃으면서 마주보고 있던 내 정수리 머리카락을 강아지처럼 살살 긁어주었다. 이미 풀어진 몸에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꿈속으로 가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애들은 너한테 좋은 냄새가 나는걸 모를까?
글쎄, 너처럼 한 번도 그런 좋은 소리는 안 해주던데-


애들이 둔한건지 내가 유난인건지. 중요한건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질 법한 이 냄새를 아직도 민감하게 받아드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목이 마르면 수분을 요하고 잠이 오면 수면을 취하듯이 나는 두준이가 고파졌고 냄새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있어 매일 매일 두준이 필요해진 셈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지만 두준이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나쁘기보단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로 인한 파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두준이를 보면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와 멤버들은 매니저 형에게 숙소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숙소도 넓고 개인 스케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더 이상 6인 1실은 무리가 따르지 않느냐는 말에 우리는 동의를 했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2인 1실 체제였다. 매니저 형이 당장 누구와 방을 쓸 거냐며 다짜고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두준이와 룸메가 되길 간절했고 결국에 난 그것을 얻게 되었다.


근데 너도 좋은 냄새가 나.
응? 나?


내가 두준이에게 오늘 처음 이 말을 꺼낸 것처럼 나 역시도 이런 말은 처음 들었다. 나한테 무슨 냄새가 난다는 소릴까. 내게서 냄새가 난다면 그 냄새는 어떤 향을 가졌다는 의미일까. 내가 느끼는 것처럼 두준이와 같은 좋은 느낌의 냄새일까. 나는 팔을 번쩍 들어서 손이고 손목이고 팔뚝이고 내 구석구석을 킁킁 거렸다. 물론 겨드랑이는 아니겠고. 한참동안 살에 코를 비벼봤지만 나는 냄새라곤 무향 그 자체였다. 진짜 나는거 맞아?


안 나는데…….
난다니까


두준이 말에 나는 다시 냄새를 맡기 위해 고개를 살짝 돌려 팔을 향해 코를 문대고 비비고 개처럼 킁킁거려도 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별 다른 냄새는 안났다. 내가 두준이한테 냄새 타령만 하니까 얘가 날 갖고 노나 싶어서, 혹운 진지하게 꺼낸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린 걸까 두준의 눈치를 살폈더니 역시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덜 씀.=